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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킵과 로퍼 애니메이션 1화/만화책 1-8권 감상


‘스킵과 로퍼’는 2018년 가을부터 일본의 만화 잡지 <애프터 눈>에 연재되어 현재 단행본이 8권까지 나온 만화로, 이번 주 부터는 애니메이션 방영이 시작된 작품이다.

간간히 재밌게 읽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트위터 타임라인에서 보기도 했고, 여자친구는 이미 만화책을 한번 읽은 상태였어서 주말 저녁 IPTV 카탈로그를 뒤지다 지나가던 제목을 놓치지 않고 한번 보기로 했는데 고퀄 갓애니여서 깜짝 놀랐다. 당장 리디북스 캐시를 녹여서 책을 전권 사다가 부부가 사이좋게 누워서 단숨에 읽었다.

간단히 소개하자면 ‘스킵과 로퍼’의 주인공은 인구 소멸로 쇠락해가는 많은 일본 시골중 하나인, 주부 지방의 이시카와현 (…이라고 해도 지도를 검색해 보기 전까지는 이게 어딘지 싶었음.) 출신의 여학생이다. 장차 동경대에 입학해 행정관료 및 정치인으로 성장해 소멸하는 지역을 재생하겠다는 야망을 품고 학업에 매진하는 성실하고 밝은 학생으로, 무대가 되는 도쿄의 한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새 친구들을 만들고, 인간관계를 배워나가며 함께 성장해나가는 소위 청춘물 순정만화이다.

담백하고 정돈된 화풍에 작가의 애정이 제각각의 방향으로 담겨있다는 것이 등장인물들의 얼굴에서 느껴진다. 많은 사랑을 받는 만화들이 그렇듯 그림과 이야기의 조화가 좋다는 느낌. 그림만 보고 픽하면 딱 생각한 그대로의 훈훈하고 달콤쌉싸름한 청춘 이야기이다.

에.. 한편 건강발랄하지만 요령 없는 주인공에게 이것 저것 가르쳐주고, 성장과 앞길을 축복하고 위로하며 같이 울고 웃는, 즉 보호자 어른의 입장이라는 것이 있다. 여기서는 도쿄에 유학 온 주인공을 맡아주는 고모가 그 입장으로 등장한다. 일단 밥도 해주시고..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솜씨를 가망 없는 주인공의 코디네이션을 코칭하는 데 발휘한다거나, 이런 저런 상담으로 주인공이 괴로워할 때 지지해주고, 기뻐할 때 박수쳐주는 분이다.

근데 이렇게, 주인공처럼 가족의 전폭적인 지지아래 빛나는 꿈을 들고, 많은 친구들과 우정과 사랑을 주고받으며 멋진 어른으로 성장하는 행운이 고모에게는 주어지지 않았었다. 그녀의 고향에는 MTF 트랜스여성으로서,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서 고민을 나누거나, 결정을 지지해 줄 친구도 가족도 없었고, 특기이자 자질인 스타일링을 직업으로 삼아 먹고 살 자리도 찾기 힘들었다. 그런 그녀가 주인공을 보며 이따금 느꼈던 뭐라 하기 힘든 괴로운 마음 잠깐 상상해보시오.

생각해보면 되게 당연히 있을 아픔인데 만화에서 고모가 연인에게 저 이야기를 털어놓고 위로의 말을 듣는 에피소드가 나오기 전까지 고모가 트랜스여성이라는걸 알고 오엥 글쿠나 하고 넘어가기나 바쁘지 어디 떠올리기나 했습니까 시스들이여 반성합시다…가 아니고, 뭐 일본 순정만화에 퀴어이야기 나오는건 신기한 일이 아니니까 이게 얘깃거린 아니다. 다만 이 이야기가 퀴어얘기가 아니라 청춘만화라는 장르에 들어가면서 시스성별 독자들과도 연결되어 보편성을 얻게 되는 것 같다고 생각했음.

무슨 말이냐. 우리의 학창시절이 그렇게 아름답지 못한 경우가 사실 많단 말입니다. 내가 못나서, 가정환경이 박복해서, 그냥 운이 없어서… 내가 상처를 준 동료가 아직 기억 한켜에서 울고 있다던지 하는 죄의식일수도 있고. 보통 상쾌한 청춘물을 순수하게 즐기기에는 약간 씁쓸한 맛이 입에 도는 성인 독자들이 사실 다수 아니겠냐구. 따라서 조카를 부드럽게 보듬는 고모가 떠올리는 아픔이 무공해 청춘 만화를 읽으며 독자로서 가끔 느끼는 그 부조리한 억하심정과 어떤 면에서 닿으며 울림이 있었달까. 퀴어 고민이 주변적인 고민이라면 고민이겠지만, 청춘물 만화에 이렇게 배치되니까 또 보편적으로 읽히게 되어서 좀 생각해보게 됐음.

다시 애니메이션 이야기로 돌아와서 보아하니 대체로 원작 1화의 호흡을 그대로 잘 옮겼다. 한편, 추후 등장인물들이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등교 준비를 하는 짧은 몽타주라던가, 학생 선서를 마치고 밀려오는 구토감에 천천히/다급히 달려가는 장면처럼 애니메이션으로 보여주면 좋겠다 싶은 장면들을 중간중간 채워서 재밌게 잘 만들어진 1화였다. 아마 1시즌을 1학년에서 마치고, 2시즌을 2학년, 만화가 완결된 후 시즌 3을 3학년편으로 내는 구성이 아닐까 아무렇게나 생각해 봄.

‘스킵과 로퍼’ 시청하기 직전까지는 ‘그남자 그여자의 사정!’을 보고 있었는데, ‘스킵과 로퍼’ 오프닝의 댄스신이라던가 (아마도 스케치업? 의 힘을 입은) 정교하고 생생한 거리, 기차역, 교실 같은 배경이라던가.. 같은 학원 청춘물이다보니 뭔가 직접적으로 애니메이션 기술 발전이 대비되는 것 처럼 느껴져서 재밌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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