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블로그입니다.

타이프라이터


중고등학교의 수행평가, 혹은 대학교의 ‘레포트/에세이’ 같은. 혹은 소설이나 소위 ‘연성글’ 등의, 어느정도 분량이 요구되는 글을 일상적으로 창작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글 쓰는 일은 대따 어렵고, 그 어려움의 상당부분은 첫 문장을 뭘로 시작하는지 결정을 내리는 데에서 기원하며, 첫 문장의 초안을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SNS보러 갔다가 인터넷 기사 읽으러 갔다가, 다니는 커뮤니티 순방을 하고 온 뒤에 비로소 새로운 첫 문장이 적혀내려질 수 있게 된다는 걸…

그리고 이렇게 첫 문단이 쓰인 다음에 다시한번 SNS보러 갔다가… 어쩌구 루틴을 마친 뒤에 다시 다음 내용을 쓸 수 있는 정신상태가 된다는 것을.

좋아. 이제 논문을 써야해. 힘내! 난 할 수 있어!/할 수 있다구!/할 수 있는데…/..좀 이따가… (웹서핑부터 해야지)
https://phdcomics.com/comics/archive.php?comicid=1993 Ph.D. comics에서도 일해야하는데 이메일 읽고 인터넷 구경하느라 종일 시간 낭비하는 에피소드가 지분이 꽤 많다ㅋ

그러니까, 글을 집중해서 쓰려니 정신이 분산되는 일거리들이 너무 많다는 얘기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했다. 아예 인터넷 브라우징이 안 되는 기계를 쓰면 내가 좀 더 창작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미국에선 누가 물건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못해도 2016년쯤부터…

https://getfreewrite.com/products/freewrite-smart-typewriter-3rd-gen 처음엔 Hemmingwrite라는 이름을, 후에는 브랜드가 되는 Freewrite라는 이름을 쓰더니 요즘은 직관적으로 용도와 기능을 설명하는 Smart typewriter라는 이름을 쓰고 있음. 제품 크기도 대충 타자기 사이즈고, 기능도 딱 타자기니까 잠재 고객에게 더 빨리 어필할 수 있는 적절한 변화인듯..

기계식 키보드에 전자잉크 디스플레이를 달고, 메모장 수준의 기능에 wifi로 문서를 클라우드나 메일로 송신하는 기능만 달고 있다. 화면 오른쪽에 빨간 전원 버튼 아래에 보이는 3-way 스위치는 wifi 온오프, 새 wifi찾기 기능을 담당하고, 왼쪽의 3-way 스위치는 작성중인 문서를 A, B, C 중에 고르는 기능을 담당한다.

그렇다. 메모장은 원하는 파일을 아무거나 불러올 수 있기나 하지, 이놈은 병렬적으로 세 편의 이상의 글은 쓰지도 못하게 제약을 걸어두는 것으로 지금 쓰려는 글에 집중하자는 컨셉을 빡세게 관철하는 것.

미친 힙스터새기들 같은 값으로 아이패드에 키보드만 달아 써도 훨씬 많은 것을 할 수 있는데? 라는 주류의 반응은 이 글을 읽을 한국의 독자들이나, 미국 현지의 고객들이나 비슷비슷하겠지만, 최소한 미국에선 은근히 수요가 있는 포지션의 기계인듯 하다.

전자타자기(Wordprocessor)는 나도 교무실 같은 데서 한두번 보고 지나쳤던 것 같기는 하지만 왕창 보급된 것 같지는 않다. 8-90년대까지 한국이 돈이 없었어서/개발이 늦어져서 워드프로세서 도입이 미뤄지는 동안 기계식 내지는 전동 타자기로 버티다가 한번에 PC 보급이 이루어진 역사가 있어서 테크트리를 스킵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한편 미국에선 전자타자기 사용에 있어서는 좀 더 저변이 넓었던 것 같다, 중고등학교 에세이도 전자타자기로 작성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들을 수 있고.

또 내 상상이지만 1990년대, 노트북이 나오기 직전이나 아직 너무 비싸던 시절, 커리어 초반을 워드프로세서로 글을 쓰며 시작한 사람들이 꽤 많을텐데, 그런 사람들이 타자만 되는 기계에 호감이나 향수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아마존 킨들같은거 쓰면서 이 정감가는 전자잉크 디스플레이로 내가 좋아하는 작문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젊은 사람들도 있을거고..

어쨌든 수 년 전부터 관심을 가졌던 기계인데, 곧 망하지 않을까 했던 내 기대를 져버리고 벌써 네 번째 모델까지 내면서 회사는 잘 굴러가는 모양이다. 5년 이상 생존한 스타트업이라니 이건 진짜 훌륭한 성과지요.

한편 일본에서는 좀 다른 맥락으로, 힙스터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회의실에 메모를 하기 위해 갖고 들어갈만한 low-profile의 전자기기 포지션으로 조그마한 전자타자기가 절찬리 팔리고 있다고 한다. 내가 일본 사람도 아니고 분위기를 잘 아는건 아니지만, 무슨 공무원이 민원인 앞에서 색깔 있는 음료수를 마시면 꼴사납다는 평가를 받기 때문에 굳이 맛을 희생해가며 투명한 음료수를 개발하면 그게 팔리는… 나라니까.

King jim의 Pomera도 기능과 성능에 비해 비싼 30만원 언저리에 팔리는 물건임. 근데 오랫동안 아주 잘팔리고 있다. 오바타 타케시 만화 ‘바쿠만’에 나오는 만화잡지 기자가 쓰는 장면이 나오더라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음.

막 높으신분들 공책 갖고올 때 짬찌가 커다란 노트북 들고오면 나댄다고 여겨지는게 이해는 간다. 나도 한국사람이고 납득은 못해도 무슨얘긴지 이해를 못하지는 않는달까. 마음은 이해가 간달까. 사진을 보면 옛날 전자사전 크기인 것 같은데, 수첩처럼 정장 안에 들어가는 사이즈라면 확실히 나댄다는 느낌은 없을 것이다.

한편 먼저 소개했던 Freewrite의 포터블 모델 (기계식 키보드 대신 펜타그래프 키보드를 쓰고, 화면이 접히는 모델)을 정식으로 (소량) 들여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런 계기로 작성한 포스트.

https://www.funshop.co.kr/goods/detail/188360

나한테 딱히 돈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별 의리는 없지만 일단 링크는 쌔워둠.

여튼 두 기계 다 뭔가 관심은 갔는데, 내가 글로 벌어먹고 산다거나, 활발하게 작문을 하는 사람은 아니지 않느냐는 자각이 있었기 때문에 저기다가 돈을 쓰진 않았다. 전자타자기 소식을 처음 접한 시점이 아마 연애를 시작한 무렵이라 냉큼 사보기 어려운 것도 있었고 ㅋㅋ 저거 아니더래도 씽크패드 모으고, 골동품 PDA 모으고 할거 다 했어서 어차피 돈이 더 있지도 않았다. 조만간 모아온 씽크패드와 pda들에 대해서도 소개해보도록 하겠음.

그래도 뭐랄까, 저런거 개발되는 뉴스 보고, 팔리고 있는걸 보고 있자면 조용한 시간에 액정화면 들여다보면서 키보드 두들기는 행위가 행동학적으로 굉장히 즐겁고 뿌듯하다는 것을 사해 만방의 인류가 공유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서 기쁘다. 내가 살일은 없지만 구경하는 것 만으로 가치가 있는 제품들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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