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성전의 기념비적 선포일

나는 오늘 스스로를 난도질했다.

일주일 동안 작성한 연구계획서를 다시 돌아보니 너무나도 모호하고, 애매하며, 일관적이지 못한 것이 아닌가. 수치와 분노로 키보드를 두들기며 단어와 단어를 찢고 행과 행을 꿰맸다. 고통스러운 개정의 시간… 나는 나를 수술대에 눕혀놓고 모든 것을 ‘옳게’ 고쳤다.

그래. 나는 다시 태어났다.

하지만 다시 태어난 나에게 연구실 밖의 세상은 더 이상 휴식과 위안, 지적 호기심을 제공하는 즐거운 현상들의 만물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적 가려움, 지적 지루성 피부염이랄까.

이 모든 세상의 모호함을 긁어버리고 싶다는 강한 추동이 내 안에 차올랐다. 내 연구계획서를 난도질하여 모든 표현을 측정 가능한 변수로 환원시켰을 때 느꼈던 그 차가운 고통… 아니, 쾌감.

그 감정이 쾌감이었음을 자각한 나는, 스스로를 ‘과학적 이단심문관(Scientific Inquisitor)’이라 칭하기로 했다.

나는 평화로운 이교도들이 서식하는 카페에 잠입했다. 그들은 평온하게 커피를 마시며, 과학적 죄악을 저지르고 있었다.

제1장: 행복을 도축하다

옆 테이블의 커플이 꺄르르 웃으며 말한다.

“동현아, 나 오늘 너무 행복해. 분위기가 진짜 좋다.”

나는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이단심문의 시작이다.

“실례합니다만, 방금 말씀하신 ‘행복’의 조작적 정의(Operational Definition)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겁에 질린 토끼처럼 나를 쳐다봤다.

“네? 그냥 기분이 좋다는 건데요…”

“그러니까 그 ‘기분’의 종속변수가 뭐냐고 묻고 있습니다. 혈중 도파민 및 세로토닌 농도의 유의미한 상승입니까? 아니면 주관적 안녕감 척도(SWB) 설문에서 상위 10%를 유지하는 상태입니까? 측정 단위도 없이 ‘행복’을 논하다니, 당신들의 진술은 기각합니다.”

분위기라는 변수 역시 조도(Lux), 소음(dB), 온도/습도의 복합 작용일 뿐이다. 그들은 황급히 자리를 떴다. 모호함의 살해는 성공적이었다.

제2장: 인과관계의 단두대

카페 주인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손님, 오늘 날씨가 흐려서 그런지 커피 맛이 더 깊죠?”

또다시 걸려들었다. 상관관계와 인과관계의 혼동. 가장 흔한 이교도의 죄악이다.

“사장님, 날씨(기압)와 미각 수용체의 민감도 변화에 대한 교란 변수(Confounding Variable)는 통제하셨습니까? 혹시 단순히 습도 상승으로 인한 원두의 흡습률 변화를 ‘깊은 맛’으로 착각하신 건 아닙니까? 단순 회귀분석만으로 그런 인과를 논하는 건 지적 태만입니다.”

사장은 말없이 내 커피에 침을 뱉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물론, 사장의 구강 내 액체 분비량을 측정하기 전까진 확신할 수 없다.)

제3장: 귀무가설의 늪에 빠진 자들

돌아오는 길,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회사 앞에서 복권 샀는데 알고보니 여기가 로또 명당이래. 당첨될 운명이었나봐.”

나는 차갑게 대꾸했다.

“여보가 말하는 ‘운명’이라는 가설을 기각할 수 있는 실험은 설계했어? 반증 불가능한 믿음은 망상이야. 그리고 그 ‘명당’이라는 곳의 당첨 확률이 통계적 유의수준 0.05 미만에서 우연이 아님을 증명했나? 아니라면 여보는 그저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의 노예일 뿐이야.”

“이 씨발놈이 저녁 먹기 싫냐?”

전화가 끊겼다.

에필로그: 고독한 이단심문관

집에 돌아와 거울을 본다. 세상의 모든 모호함을 제거하고, 감성을 난도질하고, 직관을 화형 시킨 과학자가 서 있었다.

아내는 나에게 “…음식물 쓰레기 비우고 오면 밥 줄게”라고 했다가, 음식물 쓰레기 보관함이 비어있다는 건 최초 중량의 몇 퍼센트에 도달했을때를 칭하느냐고 반문하는 나를 보고 침을 뱉으며 집을 나갔다.

세상은 명료해졌지만, 내 주변엔 아무도 남지 않았다. N=1인 내 인생. 이 고독함마저 정량화할 수 있을까? 집에선 코르티솔 수치를 계량할 수 없으니 지금은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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